두려운 광경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 데이빗 윌커슨

요한복음 13장 23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슴에 친밀하게 안겨있는 그 제자가 바로 이 요한입니다. 요한 만큼 예수님이 자애로운 분이심을 아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밧모섬에서 요한은 놀라운 거룩함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요한계시록 1:12-15).

요한은 이제 자신의 머리를 그리스도의 가슴에 대고 눕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인간의 모습을 입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거룩함을 입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말했습니다(계시록 1:17).

다니엘은 이와 똑 같은 두려움을 주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것 만으로 온 몸에 힘이 빠져버렸고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다니엘 10:5-6).

다니엘은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다니엘 10:7-9).

우리는 복음이 경박해지고 성령의 역사를 코메디처럼 극화 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잠언 29:18). 저는 그 묵시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위엄에 대한 계시를 의미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이사야도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1-5).

 

이 시대에 경외감을 일으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희미하게라도 목격하고 그 얼굴이 창백해져서 제단으로 나아와 여러 시간 동안 그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목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두려운 광경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본 모든 하나님의 종들, 요한, 다니엘, 이사야에게서 생겨났던 두려움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 주님의 이름을 가벼이 여긴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얄팍하고 희극적으로 대한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목전에서 주님을 거룩히 여기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이 친밀감이라고 부르는 것을 저는 무례함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뻔뻔하고 무례해 졌는지요! 어떤 설교자들은 얼마나 뻔뻔해졌는지 거룩한 제단에서 자신들의 약삭빠른 어리석음, 바보 같은 꿈, 하나님을 모독하는 농담 등을 홍수같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그리스도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간절히 필요한 것은 주님의 불타는 눈을 한번이라도 주시하는 것, 주님의 타는 듯한 거룩함을 보는 경외감입니다. 그러면 결코 다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만하거나 어리석은 자와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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