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선지자는 놀라운 이상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이 에스겔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려가셨는데 거기서 “모양이 놋같이 빛난” 한 사람이 에스겔에게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에스겔 40:3). 요한도 밧모섬에서 자신에게 나타났던 한 사람의 모습을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요한계시록 1:15).
물론 이 두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에스겔을 하나님의 전 문으로 인도하셨는데 거기서 그 선지자에게 놀라운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 때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밝혀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이상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 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1, 3-6, 12).
성경에서 물은 거의 항상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이상은 분명히 마지막 시대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상은 너무나 강력하며, 너무나 광대한 것이라서 에스겔은 이 이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그 이상을 본대로 서술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실상 그 이상이 끝나기도 전에 주님께서 에스겔을 멈추게 하시고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에스겔 47:6).
제가 이 구절을 재차 읽어나갈 때 성령께서는 에스겔을 멈추게 하신 바로 그 성구에서 저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구약의 선지자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제게 하셨습니다. “데이빗, 너는 이것이 아버지의 보좌로부터 직접 임한 놀라운 예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느냐? 이 마지막 시대 교회를 그 예언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겠느냐? 불어나는 강의 의미를 이해하느냐?”
그 이상은 분명 에스겔을 놀라움 가운데 빠뜨렸을 것입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저는 에스겔 선지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가지고 있던 이상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즉…들으라”(마태복음 13:17-18).
마지막 두 마디에 주목하십시오. “그런즉 들으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놓치지 말아라. 너희에게 임하는 계시를 똑똑히 보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언적 이상에서 주님께서 계시하고 계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역사상 가장 영화롭고, 가장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몸은 결코 약해지거나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수가 줄지도 않을 것이며 영적 권위나 힘에서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타오르는 힘과 영광 속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완전한 계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라고 기록했습니다(에스겔 47:10).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불어나는 주님의 임재의 바다 가운데 헤엄칠 성도들의 무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종말이 올 때까지 불어날 것입니다.
슬프게도 저는 이 마지막 때의 일부 교회와 기독교 단체 가운데 끔찍한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단체들은 하나님의 이상을 자신들이 속한 단체, 심지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만 한정시킵니다. 그들의 태도는 흔히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움직이심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바로 이곳, 우리 가운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체로부터 흘러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오셔서 참여하십시오. 우리에게 이상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일의 중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확장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도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사실상 그것은 수세기 동안 주요 종파와 교단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훼방합니다. 과거에 그러한 교단들은 자신들만이 지구 상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대변한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현시점에서 슬프게도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의 거짓 교리가 오늘날 다시 부활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교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도시나 지역이건 오직 하나의 교회만을 두십니다. 따라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영적 권위도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끔찍한 교리를 조장하는 자들은 그 지역을 “다스릴” 사도나 지도자들을 지명합니다. 저는 뉴욕시에 있는 그러한 자천 사도와 선지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이곳의 영적 세계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에 더하여 교회가 오늘날 스스로를 제한하는 경향을 보이는 방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은 1세기 경의 초대 교회와 원래 사도들을 회고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치 고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단체들은 자신들의 모든 활동과 헌신, 성경에 대한 연구를 오직 초대 교회의 방법들을 흉내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쏟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초대교회의 방법으로 돌아가기를 반드시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사실 이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은 것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헤엄할 물”을 주신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에 있었던 몇 방울의 물을 추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본 불어나는 이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에스겔 47:3-4).
에스겔은 여기서 성령의 불어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불어날 것입니다.
이 강의 발원지와 기초는 바로 십자가 입니다.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이 물의 문자적인 표현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한복음 19:34).
이 적은 양의 물이 바로 에스겔에게 이상이 열리기 시작할 때 그가 본 최초의 물의 양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응시하다가 소량의 물이 “그 문지방 밑에서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고…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에스겔 47:1-2).
이 불어나는 물의 흐름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했던 오순절의 상징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며 그 강이 전 세계로 흘러 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38-39).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 생수의 강이 성령이라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며 영광이 가득한 오순절은 바로 미미한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며 폭과 깊이, 부피와 힘 그리고 영광의 회복에 있어서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가 바로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시작인 오순절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 물이 흐르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다른 120명의 사도들에게 이 물은 발목 정도까지 차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가 갈수록 그 양은 불어났습니다.
교회가 탄생하고 처음 몇 세기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콘스탄틴 황제가 권좌에 올랐을 때 그는 감옥과 수용소의 문을 열고 노예로 전락한 모든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석방했습니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선언했습니다.
그러한 박해의 시기 동안 교회의 성장은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그때가 바로 물이 불어나가 시작한 때입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계시를 받음에 있어서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물이 무릎에까지 차오르는 것을 누렸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을 새로운 믿음의 장으로 인도한 또 하나의 통로입니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 흐른 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허리에까지 찼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계시를 더욱 받아 성장하였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상상해 보면 참 즐거워 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계시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습니까! 허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그들이 한 때 복을 빌던 우상의 조각들을 부숴버리고 하나님의 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목도 하는 것은 분명 가슴 벅찬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물이 주는 기쁨과 생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정점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에게 임한 이상에 예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놀라운 여정에 대동 시키셨습니다. 척량줄을 가지고 주님은 일천 척, 약 450 미터 가량을 재셨습니다. 주님과 에스겔은 물속에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물의 높이는 발목에 닿는 정도였습니다.
에스겔은 “주님께서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에스겔 47:3). 주님은 계속해서 에스겔로 하여금 앞으로, 더 깊고 멀리 물길을 따라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일천 척을 더 가자 물은 무릎에까지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에스겔은 미래를 향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상에서 강의 마지막 일천 척 부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을 마지막으로 척량한 때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이 마지막 척량의 단계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물이 너무나 깊고 장대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에스겔 47:5). 그는 우리에게 “물이 내 머리 위로 불어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에스겔아, 이 창일한 바다가 무엇이냐? 이 강이 생명과 부활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런 영광 가운데 헤엄칠 복을 받을 자들은 누구이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가 얼마나 어리둥절 했을 지 상상조차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셔서 매우 감화를 받은 상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의로운 자에게 임할 엄청난 성령의 역사에 비하면 여러분이 경험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우리 가운데 놀랍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영화로운 몸을 입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에스겔의 이상에 나타났던 바로 그 강을 어렴풋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본 것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사탄의 공격으로부터의 보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이사야 33:21). 이사야는 여기서 노예들이 노를 젓는 전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큰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대적 마귀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혼돈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입구를 밀폐하라. 출항하라. 돛을 팽팽하게 하라”고 자기 선원들에게 짖어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와 그의 하수인인 항해사들은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 돛을 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노예로 사로잡힌 사공들은 완전한 혼돈가운데 앉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이점을 명확히 해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생명의 강에 사탄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시편 35:4-6).
소생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에스겔 47:9).
에스겔이 강변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그는 강의 양 둑에 있는 “수많은 각종 나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그 강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잎은 결코 시든 적이 없고 그 열매는 놀라운 치유를 가져왔습니다. 생명이 이 높이 솟은 열매 맺는 나무들로부터 사방으로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강은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동일한 사망의 홍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에이즈는 우리 시대 파멸의 대양, 현대의 사해를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끔찍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였습니다(마태복음 24:12).
- 바울은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비웃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의 주님 재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사장시킬 것입니다. 그들의 조롱은 도덕의 쇠퇴와 죄의 창궐을 유발할 것입니다.
- 거짓 선지자들이 사망의 교리를 전파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디모데후서 3:13). 지금도 영적 사망이 배교한 교회들에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사망과 파멸의 한 가운데서도 저는 제 영혼에 쩌렁 쩌렁 울리는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나의 강은 더욱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이 흐르는 곳은 어디에서든 모든 것이 소생할 것이다.”
몇 년 전 까지 중국의 교회는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적이 성도들을 지하로 내몰았으며 수 십년 동안 중국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관한 언급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중국의 교회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강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서방이 중국의 형제 자매들의 운명을 궁금해 하는 동안에도 강은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에서 수천만 명의 성도가 하나님의 생명의 강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이 흐르는 곳은 어디든 무엇이든 소생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신 것과 꼭 같이 말입니다.
그 강은 동구 유럽 전역에서도 홍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15년 전만 해도 누가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러시아라는 요새에서 그 강이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흐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의 생명은 이 모든 나라들과 전 세계 다른 나라들 가운데서도 솟아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많은 뉴욕 시민들은 외부로의 이주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곳에 깊이 흐르는 생수의 샘을 파셔서 강물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거대 도시의 한쪽 구석에서 도시 전체로 주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극장가도 하나님의 강의 물결을 막지 못했습니다. 월스트리트 금융가도 불어나는 강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진적 동성애자들도 자신들이 모여 사는 구역 안으로 이 물결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낙태 옹호론자들도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임신한 여성들의 가슴에 이 생수의 강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시청과 시 당국도 그 범람의 속도를 늦출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이슬람의 율법학자들도 자신들의 회당과 사원으로 범람하는 강물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은 점점 더 불어나고 있으며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소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는 혼돈이 주재하고 있습니까? 사망이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날뛰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에스겔 47:9).
저는 주님께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실지 그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이 불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세기 전 세계를 휩쓸었던 세계적 운동인 공산주의를 동독에서, 동구 유럽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하루 밤 새에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도 성취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일부는 제외될 것입니다.
이 경이로운 강물의 소생에서 제외되는 자들은 “소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에스겔 47:11).
에스겔은 진흙으로 가득한 시궁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습지로 강이 흐를 때에도 그것은 치유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강이 그곳을 완전히 비껴감으로 그곳은 말라 소금으로 변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소금은 패역과 황폐함의 상징입니다. 에스겔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소금 늪은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죄와 사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구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약속하고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을 이행하지 않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고 이사야가 기록했을 때 그는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합니다. 그들은 경건한 책망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영혼 깊은 곳까지 측량하시고 탄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강물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만지도록 허락 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생명은 그들로부터는 솟아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배에서는 생수가 아니라 더러운 험담, 경솔한 아첨, 거짓말과 왜곡된 말들이 시냇물처럼 꾸준히 흘러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명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의 사방에 있는 모든 것들에는 싸움과 비통함만이 다가옵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연민가운데 몸부림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문을 품고 불평을 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진흙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방에 사망을 퍼뜨리는 영적 위선자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물 없는 샘”입니다(베드로후서 2:17). 에스겔을 따르자면 사망선고가 그들에게 이미 내려졌습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에스겔 47:11). 이것은 황폐케 되리라는 저주로서 열매도 없고 완전히 쓸모없는 삶으로 내쫓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패역함에 견고히 서서 파괴적인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슬프게도 하나님께서는 생수의 강이 그들의 주변부로 흐르게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몰아넣은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소경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시자 그들은 속임수에 넘어가 사방에 파멸이 닥쳐올 때 “평화, 평화”를 외칠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 사망의 지대를 목도하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이 흐르는 곳마다 사방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지대는 황폐하여 하얗게 메마른 상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어떻게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그토록 공허하고 메마른 상태가 되어 주님의 생명수로부터 단절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을 따라 살았다. 그들은 뻔뻔스러우며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거역하였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비방하였다. 그들은 세상에 너무나 깊이 연루되어 세상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을 구원하였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섰다”(베드로후서 2:10-21 참조).
이 비극중에서도 제게 가장 슬픈 부분은 이 마른 샘의 대부분이 한때는 생수의 샘이었다는 점입니다. 한 때 그들의 삶으로부터는 치유와 축복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비통함, 증오심 그리고 사망을 뱉어냅니다.
성도 여러분, 간곡히 촉구합니다. 생명의 강이 여러분의 사방에서 흐르는 동안에도 고집과 비통함에 매여 있으시다면 스스로에게 그 길을 계속 가도록 허락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배를 생수로 가득 채우시도록 허락하십시오. 여러분은 인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 주님의 계시가 홍수처럼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육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에스겔에게 주어진 광대한 이상을 이해하셨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는 그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광대함을 볼 눈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생수의 강이 임하고 있습니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기독교 사역체인 틴 첼렌지(Teen Challenge)의 설립자이십니다. 그는 또한 [거리의 아이들,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죠이선교회 역간]을 비롯한 다수의 좋은 책을 쓴 저자입니다.
현재 그는 타임즈 스퀘어 교회의 목사님이며 아내와 뉴욕에서 살고 있습니다.